[334호] 조합원 칼럼/나는 죄인이 아.니.다.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18-1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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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칼럼] 나는 죄인이 아.니.다.
# 장면 1
혜영(가명,35,여)은 결혼을 하고 몇 년 후 임신을 했다. 모두의 축복 속에 태어날 아이는 태어나기도 전에 관심과 사랑을 흠뻑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매일 아침 아빠는 배를 쓰다듬으며 연신 흐뭇해하고 그녀도 태교를 위해 애를 쓴다. 아이는 그렇게 뱃속에서부터 사랑받으며 모두가 기다리는 아이가 되었다.
# 장면 2
은정(가명,24,여)은 대학교 때 그를 만났다. 학교 동아리활동을 했고, 곧 그들은 연인이 되었다. 그는 자기가 조절할 수 있다며 관계를 요구했고, 그렇게 임신이 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임신테스트를 했다. 선명한 두 줄..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무엇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앞이 먹먹했다. 그에게 말했다. 그녀의 뜻에 따르겠단다. 낳으면 어떻게 할거냐 물었더니 대답이 없다. 수술에 필요한 돈은 본인이 마련하겠단다. 병원에서는 남자(아빠)의 동의가 있어야 수술을 할 수 있단다. 아빠의 동의를 거친 후 의사는 수술 부작용에 대해 말했다. 자궁염증이 생길수도 있고, 앞으로 수정이 잘 안될 수도 있단다. 그리고 임신중절수술은 아이를 낳는 것과 같으니 각별히 몇주동안 몸을 조심하라고 한다. 그렇게 차가운 수술실에 올랐다.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눈물이 흘렀다. 수술 후 피가 연신 쏟아졌다. 무서웠다. 원래 그렇단다. 그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아무도 모르게 한 수술이기에 오히려 밝은 척 하며 학교생활을 해야했다. 궂은 날에는 수술했던 부분이 욱신거린다. 욱신거리는 몸만큼 그날의 기억이 은정을 괴롭힌다. 그도 그럴까. 결국 그들 사이에 남겨진 것은 생명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욱신거리는 몸 그리고 빈 공간으로 남겨져버린 관계였다.
# 장면 3
수술을 위해서는 1박2일간 입원을 해야 했다. 오후에 입원해서 여러 검사를 받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저녁 늦게 의사들이 왔다. 다음날 아침에 깨어났을 때는 모든 게 끝나 있었다. 간호사가 미소 지으면서 쟁반에 담긴 아침식사를 가져왔다. 병원비는 전액 국가부담이어서 나는 서명만 하면 되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국가’가 나를 걱정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국가가 내 몸을 걱정하고, 나의 장래를 걱정한다는 느낌. 그런 국가를 자기 나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출처 : 한겨레신문, 2018년 9월 6일자 기사, “[세상읽기] 낳고 싶을 때 낳을 권리”,
생명을 대하는(여기서 생명은 태어날 아이와 산모 모두이다) 세 장면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 나라에 따라 같은 생명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가 이토록 크다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현재 한국사회는 낙태를 선택하는 여성들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이 아빠에게는 죄를 묻고 있지 않다. 더 나아가 과연 “자발적 임신중단이 죄인가?” 그리고 만일 이것이 죄라면 “과연 여성들은 ‘자발적 임신중단’을 하지 않을 것인가?” 라는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오히려 의사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온갖 인터넷 정보로 ‘사후 피임법’ 등의 응급조치들이 이뤄질 것이고 불법시술 의사를 찾아다니며 ‘자발적 임신중단’을 더욱 ‘자발적’으로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불법으로 얼룩진 방식으로 ‘임신중단’이 진행된다면 여성의 건강은 더 크게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한편, 세계보건기구(WHO)는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절을 여성이 가져야 할 ‘기본 권리’로 인식한다. OECD 회원국 30개국 중 23개국이 사회경제적 이유로 인한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더욱이 2016년 5월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임신중단율은 임신중단을 금지하는 나라보다 허용하는 나라에서 오히려 낮다. 여성의 건강과 권리를 보장하고 출산·양육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공유하는 나라일수록 원치 않는 임신이 줄어들고 임신중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회경제적 조건이 개선되기 때문이다.
제1 야당대표가 ‘출산주도성장’을 말하고 보건복지부가 낙태수술을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 여성인권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이채민(충남여성정책개발원지부 지부장)
△폴란드 낙태금지법안에 반대하며 대규모 시위와 파업을 벌인 폴란드 여성들의 <검은 월요일>피켓 중에서 (의회와 정부는 결국 법안을 폐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