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호] 노동이슈 / 탄력근로제가 나쁜 이유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18-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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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칼럼, 한겨레 발췌]
[탄력근로제가 나쁜 이유]
고용부가 뇌심혈관질환 직업병을 판단할 때 기준으로 삼는 ‘과로’는 ‘4주 동안 1주 평균 64시간 일한 경우’다. 현행 탄력근로제 아래에서도 ‘과로사’가 가능한 정도까지 일을 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그 기간을 1년으로 늘리면 26주 동안 주 80시간 일을 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강의를 하면서 파워포인트 화면을 띄웠는데 슬라이드 몇 장에서 설명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 이 사진을 왜 띄웠지?’ 시간을 좀 끌면 생각날 줄 알았는데, 끝내 생각나지 않았다. 사진 몇 장을 그냥 넘겨버렸다. 그동안 수십번도 더 설명했을 텐데… 참 이상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오후 강의 장소로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데, 그동안 전혀 하지 않던 차멀미를 했다. 도착하기 전에 심각한 상태가 되면 어떻게 하나 조마조마하며 다행히 강의 장소에 닿았다. 저녁 무렵 집에 도착해 아파트 현관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버튼을 누르려다가 ‘어, 우리집이 몇층이지?’ 잠시 멈칫했다. 다행히 곧 생각나기는 했다. 참 이상했다.
집에 들어와 에스엔에스(SNS)에 간단히 “몸이 좀 이상하다”는 글을 쓰고 잠들었다. 새벽에 전화벨이 울려서 받았다. 의사인 친구가 “지금 빨리 큰 병원 응급실로 가봐야 한다. 증세가 나타난 뒤 3시간 안에 갔어야 하는데 벌써 많이 늦었다. 신용카드 한 장만 챙겨 들고 나와서 대학병원 응급실로 빨리 가라. 운전도 하지 마라”고 다그쳤다.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나를 처음 진단하는 의사가 자신의 목에 걸치고 있는 청진기를 가리키며 “이게 이름이 뭐죠?”라고 물었는데, 답이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진찰기? 아니 진단기인가?’ 끝내 답을 못했다. 병원에서는 나를 중환자 취급 했다. 환자복으로 갈아입히고 ‘낙상 고위험’이라고 표시한 팔찌를 손목에 채워주었다. 검사받으러 갈 때도 직접 걸어가지 못하게 하고 침대에 누인 채 환자 이송 담당 직원이 와서 검사실까지 침대를 밀어 이동시켰다.
여러 가지 검사를 받는 데 하루가 걸렸다. 나로서는 첨단 의학의 진수를 모처럼 경험한 셈이다. 초조하게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다행히 모두 정상이라며 의사들은 “최상의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했다. 의사들이 내린 결론은 “단기간의 극심한 과로가 잠시 이러한 증세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옆에서 초조하게 지켜보는 아내에게 야단맞을까봐 의사에게 사실대로 말하지는 못했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러한 증세가 나타나기 전 며칠 동안 지방 일정이 겹쳐 1시간 정도밖에 못 자고 나간 날이 두세 차례 이어졌다. 일정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일을 몰아서 하는 이른바 ‘탄력근로’를 한 것이다. 평소 평균 정도의 체력을 가졌다고 자부하던 남성에게 그 정도의 노동은 도저히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하루 기준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규정하고 주당 노동시간을 40시간으로 정한 것은 그 이상의 노동은 신체에 무리가 가게하고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본다는 뜻이다. 하루 2시간의 연장근로를 가능하게 하고 주 52시간까지는 일할 수 있도록 규정했으나 연장근로에 대해서는 0.5배의 수당을 추가로 지급하도록 기업에 부담을 지우는 규정을 만든 것 역시 가능한 한 연장근로를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취지다.
탄력근로제란 위와 같은 기준을 무시하고 특정한 날에 집중적으로 초과노동을 시키더라도 일정 기간 동안 평균 노동시간이 기준을 초과하지 않으면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도록 기업의 부담을 없애주는 제도다. 그 기간이 최대 3개월인 현행 탄력근로제에서도 6주 연속 주 최대 64시간까지 노동자에게 일을 시킬 수 있다.
고용노동부가 뇌심혈관질환 직업병을 판단할 때 기준으로 삼는 ‘과로’는 ‘4주 동안 1주 평균 64시간 일한 경우’로 보고 있다. 현행 탄력근로제 아래에서도 ‘과로사’가 가능한 정도까지 합법적으로 일을 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그 기간을 1년으로 확대하면 26주 동안 주 80시간 합법적으로 일을 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노동자가 과로사하기에 충분한 노동시간이 얼마든지 가능해지는, 그래서 노동자들을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이도록 만드는 탄력근로제 기간 확대 시도에 노동자들은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다.
연간 노동시간이 1300~1700시간대인 선진국(OECD 평균은 2015년 기준 1692시간)과 2071시간인 한국에서 탄력근로제를 동일한 기준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더구나 올해 2월 국회를 통과한 주 52시간 상한제가 온전하게 시행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탄력근로제 기간을 확대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노동조건이 개선되기도 전에 후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안락한 삶’의 추구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제인 탄력근로제 기간 확대에 노동자들이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