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서] 출연연구기관의 연구개발시스템, 공공성 강화로 대전환하라!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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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
출연연구기관의 연구개발시스템, 공공성 강화로 대전환하라!
- 코로나19 비상사태에서 다시 드러난 출연연의 취약한 사회적 역할 -
코로나19(COVID-19: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세계적 유행병이 되어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두 달 가까이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우리나라도 3월 11일 현재 확진자 7,755명, 사망자 61명에 이르렀고, 아직도 이 질병의 의학적 사회적 통제는 명확한 가시권에 들어와 있지 않다. 가히 국가적 재난상황이라 할 수 있다.
21세기 들어서 사스(2002년), 신종플루(2009년), 메르스(2015년) 등 바이러스 감염병은 5년 내외의 주기로 찾아 왔고, 다시 올해 코로나19가 우리를 엄습하고 있다. 여러 전문가들의 예측에 따르면, 이러한 바이러스 감염병의 유행은 인류의 간섭과 침투를 받지 말아야 할 야생 생태계가 인류의 생태계 파괴와 기후변화로 그 독립성을 잃고 인류와 접촉하게 되면서 앞으로도 더 자주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도 이러한 위기 상황에 대비하여 과학기술적 전문성과 역량을 구축하고, 이에 근거한 사회적 의학적 대응 시스템과 관련 정책수단을 단단히 마련해 두어야 한다. 이것은 국가의 당연한 의무이다. 국가는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 등 대유행의 위험이 있는 심각한 질병으로부터 국민을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 감염병 발생과 확산을 저지하고 공공 보건의료 혜택을 모든 국민에게 제공하여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국가의 기본 책무이다.
우리나라에서 국가의 이러한 공공적 역할을 과학기술적 전문성과 역량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의 중요한 사회적 역할이다. 이것은 납세자인 국민이 공공연구기관에 대해서 품어서 마땅한 사회적 기대이고 요청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여러 바이러스 감염병 위기 때도 그랬고 현재의 코로나19 위기에서도 출연연구기관의 목소리나 역할은 잘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우선, 그동안 수없이 문제점을 지적해 왔고, 정권교체기마다 경쟁 후보들이 폐지하거나 근원적으로 개혁하겠다고 앞다투어 외쳤던 PBS제도(연구과제중심 운영제도)가 여전히 구조적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다. 출연금으로 지급하지 않은 부족한 예산(인건비, 경상비, 연구비)을 외부수탁과제를 통해서 충당하라는 이 제도 하에서 출연연과 그 구성원들의 선택은 특별할 것이 없다. 공공연구기관인 출연연은 정부의 수탁과제를 많이 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해당 부처와의 원만한 관계를 중장기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기관의 재정적 안정성 확보에 필수적이다. 개별 연구자들도 수 만 개에 이르는 개별과제를 해당 부처 관료와의 협의와 협상을 통해서 수주하기 때문에 기관과 마찬가지로 관료적 통제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여기에 (청와대보다도 더 힘세다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갑 중의 갑’ 기재부가 예산권을 바탕으로 출연연에 강요하는 기관평가제도와 개인평가제도가 더해진다. 서로 다른 연구분야를 연구하는 출연연들과 연구자들을 기재부가 정한 세부평가지표에 따라 1등부터 꼴찌까지 줄 세우는 기관평가제도와 개인평가제도는 1년 단위로 출연연과 연구자를 평가의 사이클에 집어넣고 뺑뺑이 돌린다. 이런 환경 속에서 출연연과 그 속에서 일하는 연구자들은 어떤 가치 지향을 강요받거나 선택하게 될까?
경쟁을 통한 순위 강요가 효율성을 가져온다는 전형적인 산자유주의적 시장가치관으로 중무장한 기재부가 강요하는 이런 시스템 하에서 출연연의 공공성(공공적 역할)과 연구자의 공공적 사회적 책무 의식은 고사하기 십상이다. 현재 출연연의 거버넌스 구조를 들여다보면, 이러한 공공적 역할이나 이해관계를 대변할 사회적 이해당사자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관료나 관료가 임명한 이사들이 출연연 지배구조를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출연연 스스로가 코로나19와 같은 국가적 재난상황 극복을 위한 공공적 역할을 자신의 주된 임무로 삼기 어렵다.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수탁과제시장에서 다른 경쟁자에 앞서 과제를 따오는 ‘시장경쟁력’(시장성)을 확보하는 것이 출연연의 최우선 과제이다. 해마다 살림살이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서 공공적 역할(공공성) 실현은 나중 문제다. 연구자들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내부 경쟁에서 개인평가지표(기관재정 기여도, 논문, 특허 등 각종 실적지표)에 따라 자신의 처우와 승진 등이 좌우되므로 중대한 과학기술적 사회적 문제해결에 기여한다는 사회적 공공적 책무 의식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현재 시스템에서 생존하려면 이것이 합리적 선택으로 보일 것이다.
물론 정부와 관료는 국가적 현안문제 해결이나 재난상황 극복을 내세우며 긴급히 예산을 투입해서 특정 목적을 가진 긴급 연구사업을 추진하며 여기에 출연연들을 동원하곤 했다. ‘시장적 가치’와 ‘경쟁’을 강요받는 출연연들이 갑자기 협력해서 ‘공공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동원된 것이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정부는 코로나 19사태와 관련하여 지난 2월 백신과 치료제 개발을 위해 긴급히 과제응모 공고를 냈다. 긴박한 국가적 재난상황에서 필요한 대책을 신속히 마련하기 위해 정부가 이런 조치를 취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미 사태가 악화하기 시작한 후에 이런 응급대응에 나서는 정부의 자세는 소재부품장비 관련 대책을 세울 때와 마찬가지로 ‘졸속’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연구 현장에서도 이미 수행하고 있는 연구사업을 뒤로하고 긴급과제에 집중하여 참여하는 데는 적지 않은 현실적 어려움이 따른다. 중장기적으로 지속적인 기초연구와 임상실험을 거쳐야 성과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연구과제를 긴급과제로 수행할 때 원하는 연구성과를 단기간에 얻을 수 있겠는가?
이제 뚜렷한 사회적 비전과 공공적 목적을 가지고 중장기적 시각에서 출연연의 연구개발시스템을 근원적으로 재정비할 때이다. 코로나19가 초래한 국가적 재난 상황은 출연연의 지배구조, 운영시스템, 역할을 ‘시장성’이 아니라 ‘공공성’의 기준으로 다시 들여다볼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 노동조합은 출연연의 사회적 공공적 역할의 재정립과 강화를 위하여 다음의 제도 개편 원칙과 기본 방향을 지키고 실현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 노동조합은 정부, 출연연, 사회적 이해 당사자와 함께 이러한 원칙과 기본 방향의 구체적 실현에 대하여 언제든지 진지하고 성실한 대화에 나설 용의가 있음을 밝혀둔다.
- 출연연에 대한 전면적인 관료적 통제지배구조를 시급히 혁파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PBS 제도를 전면 폐기해야 한다. R&R은 변종 PBS일 뿐이다.
- 출연연의 지배적 가치는 시장성이 아니라 공공성이어야 한다. 이 원칙에 따라 기관평가제도와 개인평가제도를 전면 개편해야 한다.
- 위의 원칙과 기본방향에 상응하여, 예산제도 등 출연연을 둘러싼 각종 제도적 환경을 정비해야 한다.
- 출연연과 소속 구성원들도 자신의 공공적 역할과 사회적 책무를 설정하고 실현할 과제에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간의 수동성에서 벗어나 이러한 시스템 변화를 위하여 주도면밀한 기획과 준비에 적극 나서야 한다. 정부와 관료 탓만 할 수 없다.
2020년 3월 11일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